2020 Midday Decibels_Yeemock Gallery
2019

오후 서너 시, 벽과 벽 사이

안소연, 정주영
미술비평가

Three or four pm, between the wa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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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되기 위한 형상

[이현우: 오후 서너 시, 벽과 벽 사이]  누크갤러리

안소연 - 미술비평가

그것은 다시 그림이 되기 위해 형상을 갖는다. 이 형상들은 여럿의 풍경에서 불려 나온 것인데, 어떤 분위기로, 장소 간의 낙차 없이 “닮음” 속에 공존한다. 흡사 사진처럼 우연 속에서풍경의 한 찰나를 특별한 어떤 것으로 끌어내는 시각적 감동을 일으키면서도, 그는 현실의 풍경을 바라보던 눈의 감각을 경유하여 붓을 쥔 손에 이르러 이미 눈이 본 것에 대해 그릴 것을다짐한다. “오후 서너 시”라는 공간적 시간과 “벽과 벽 사이”라는 시간적 공간을 병치시킨 전시의 제목처럼, 이현우는 그러한 풍경의 조건들이 이루어내는 회화적 장면을 드러내기 위해붓의 흔적과 형태의 자리를 세밀하게 조율한다. 그림 그리는 이의 눈에 붙들린 풍경은 마치그림이 되기 위한 형상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풍경 그림 앞에 서게 될 또 다른 이의 경험으로되돌아가기 위해 표현된다. 붓의 떨림과 물감의 두께, 추상적인 선과 색의 자리, 그 모든 것들의 당위를 설명하기 위해 결정된 형상으로서의 풍경처럼, 펼쳐놓은 이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그의 그림 앞에 서있는 자들이 겪어야 할 바라봄의 경험이다.

그가 말한 대로, 그는 풍경 속에서 “일상이 회화로 전환되는” 순간을 관찰한다. 오후 서너시, 벽과 벽 사이로 특정된 풍경의 조건은, 그것이 회화로 전환되는 예측할 수 없는 모험을일으킨다. 그것은 풍경의 한 장면을 지시함으로써 재현된 대상과 동일한 것, 즉 “같음”으로간주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그것과 닮은 형상들이 현실로부터 멈춘 채로 비장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환기시킨다. 각각의 형상들이 지닌 추상성과 다수의 붓질이 지닌 적막감이 이러한 존재의 인식을 크게 북돋아주는데, 이는 그 그림 앞에 멈춰 선 구경꾼의 시선을 (잠시) 사로잡아둠으로써 어떤 사건처럼 예측할 수 없이 일어난다. 이처럼 평범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일상의 단조로운 풍경들이 회화로 전환되는 순간에 다다르기 위하여, 이현우는 사진가의 시선과 회화적 경험이 어떤 일치와 공감을 이루는 현상학적 지각의 역설에 대해 염두에 두고 있는듯하다. 가늠해 보면, 그는 시각 중심의 재현과 맞서 불화를 조장하는 다수의 감각에 의한 지각 경험을 통해 사진의 본질에 대해 사유했던 바르트(Roland Barthes)의 논의와 불확실한 회화에 있어서 체험된 시각을 강조했던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논의를 어떤 이미지에 대한 사유의 접점 안에 중첩시켜 놓도록 한다. 그의 적막한 그림 앞에서, 나의 생각은여기까지 이른다.

이현우의 개인전 《오후 서너 시, 벽과 벽 사이》에는 큰 그림 일곱 점과 작은 그림 열한 점이 서로 마주하는 두 개의 전시 공간에 나뉘어 함께 설치됐다. 이러한 대비와 그것의 공존은그의 작업 전반에서 일관된 태도로 드러난다. 이현우는 피치 못할 불협의 정황이 어떤 파열을일으키기 바로 직전에 (도리어 역설적인 균형을 과시하면서) 상황을 동결시키려는 듯 회화적사건의 불확실성을 화면에 크게 구축한다. 이를테면, 재현과 추상의 불확실한 혼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임의의 조형적 질서를 찾아내려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때에는, 일관성 없는 붓의흔적들이 한 화면에서 조형적 불균형을 초래할 위기를 드러내기도 했고 형태와 배경의 극단적인 대비가 텅 빈 화면을 구축할 정도로 시각적 불화를 극대화시켰던 적도 있었다. 그가 지속해온 일련의 태도는, 어찌됐건 풍경 속에 푹 파묻히게 될지도 모를 회화의 존재에 대해 되레그것(풍경-대상)으로부터 벗어난 사유의 가능성을 탐색해왔다. 그는 일상에 붙들린 평범한 풍경이 언젠가 평면의 비장한 질서를 성취해낼 “그림”이 되기 위한 명분을 찾아 제시함으로써,그 경험의 간극에 놓인 불확실한 정황에 대해 지각할만한 임의의 필연적인 가능성을 살핀다.말하자면, 오후 서너 시, 벽과 벽 사이 같은 그런 것이다. 요컨대, 그가 말하는 “일상이 회화로 전환되는” 경험의 간극에서 그 명제의 당위를 얻기 위해 그는 오래 전 시각 중심의 관습적경험에서 물러나 신체의 추상적 지각 경험에 몰두했던 회화적 전환을 다시 상기시킨다.

이때, 어떤 의미에서건 전시의 공간은 풍경과 그림 사이를 오가는 우리의 지각과 그에 따른 추상적 사유를 돕는다. 전시장의 동선은 크게 둘로 분할되어 있는데, 사각형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대각선이나 혹은 원의 지름처럼 생긴 하나의 창/벽이 그 둘을 매개하는 자리에 있다. 그 창/벽은 아주 얕은 두께의 공간을 갖고 있어서, 제 뒤로는 꽉 찬 큰 공간을 지탱시키고 있으며, 정면을 향하여는 투명한 유리면을 통과하여 마주한 신체를 아우르면서 경험의 공간을 확장시키고 있다. 분할과 매개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이 경계는, 지각하는 주체에 의해 사유되는 추상의 공간을 탄생시킨다. 이렇게 전시 공간의 건축적 구조가 새삼스럽게 “공간”에 대한 사유의 지평을 이끄는 데에는 나름의 짐작할만한 이유가 있다. 이현우는 유리로감싼 그 작은 외벽 사이에 그림 한 점을 걸었다. <줄긋기>(2018)라는 제목의 그림이 함의하는회화적 명분은, (가만히 들여다 볼 때 서서히 드러나는) 그것의 추상성과 적막한 붓질의 조형성에서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것은 내가 볼 때 “발견해내는” 것이다. 100호가 넘는 캔버스를 세로로 놓고 그린 이 그림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숱한 선들이 교차하면서 구축되는 색면의 추상적 조형에 대한 사유를 돕는다. 유리창 너머 얕은 공간에 놓인 이 그림과 마주서서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은, 어떤 것과 닮아 있는 이 형상들 가운데 유독 “줄긋기”의 행위가 새롭게 출현시키는 추상적 존재에 대한 경험에 이르게 될 것이다.

줄긋기의 행위는 이처럼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닌데, 대상에 묶여 있는 명확한 윤곽선과 달리 이 줄긋기는 “일상이 회화로 전환되는” 임의의 사건을 매개하게 될 (말없는) 사유의 실체가 된다. <줄긋기>에서는, 벽과 바닥 사이에 기대어 놓은 여덟 개의 막대가 언뜻 완전하게 멈춘 정물 같은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거의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막대를 특정한 사물로 인식해버리려는 시각적 충동을 상쇄시키듯, 이현우는 그 대상으로부터 해방되어 곧공간 지각에 몰두할 “줄긋기”를 감행한다. 즉, 사물에 대한 인식을 한껏 추월하여 일련의 풍경이 지시하는 대상에 시선을 붙들어 놓지 않고 급기야는 “사물 없이” 줄긋기의 행위가 일어나는 추상의 공간을 사유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면에 그어진 여러 개의 줄은사물(대상)의 윤곽이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 없이 혹은 그것과의 닮음만을 허용하면서) 공간의형상을 지각하도록 여럿의 감각을 확장시켜주는 존재에 가깝다. 이 그림에서 줄긋기의 연쇄적인 행위는 임의의 시간을 내포하는 풍경의 공간적 특성에 의한 의외의 발견이라서, 이러한 순간적인 포착을 통해 뒤늦게 발견될 조형적 질서는 그림을 바라보는 이들에게서도 다시 한 번일어나는 예측 불허의 모험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창/벽을 지나 공간으로 진입해 들어가면 거기에는 대략 30호 안팎의 크기를 가진 작은 그림들이 둘씩 짝을 이루듯 큰 벽에 놓여있다. <벽과 벽 사이>(2019)와 <네다섯>(2019), <서너 시>(2019)와 <늘어진 오후>(2019)처럼 엇비슷한 크기로 그려진 특정 시공간의 인상은, 큰 풍경의 일부를 잘라내 많은 누락과 생략을 감행함으로써 (예측할 수 없었던) 익숙하게 닮은 어떤 분위기로 맞닿아 있다. 서로 닮은 이 “작은 그림들”에서, 이현우는 <줄긋기>로 시도했던 추상적 조형 질서에 대한 사유를 보다 구체적인 몸의 지각으로 탐색해 보려는듯하다. 추측해 보건대, 그는 여기서 “큰 그림”과는 조금 다른 시도로 회화에 대한 지각 경험을 살핀다. 이를테면, <벽과 벽 사이>에서는 수직선과 대각선이 이루어내는 어느 정도의 공간감과 무채색의 명도가 나타내는 형태의 중첩이 단번에 구경꾼들의 시선을 끌지만, 여기서는(마치 <줄긋기>에서 사물의 형태에 붙들리지 않은 추상의 선들을 발견해냈던 것처럼) 드러나지 않은 화면 바깥의 광경에 대한 바라봄이 반드시 경험되어야 할 테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자의 경험,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흰 색의 큰 벽에 걸린 <벽과 벽 사이>와 <네다섯>에서, 이 불확실한 풍경들이 나를 이끌어주는 시각적 감동은 드러난 것들 외의 “나머지”의 존재를 내가 지금 여기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의 틀 바깥과 견주어 한없이 작은이 그림이 드러내는 현전은, 잘려나간 나머지의 풍경을 지각하려는 순간에 나타난다. 이현우는 작은 그림들에서 유독 화면을 자르는 화가의 선택에 대해서 주목했는데, 그는 회화의 고유한 특성을 특히 화면 자르기에서 찾았던 것 같다. 흥미롭게도 사진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려했던 바르트도 사진의 틀에 주목하면서 사진에 “가려진 시야”를 만들어내는 화면 바깥에 대한인식을 크게 강조했다. “보는 사람을 그것의 틀 밖으로 끌고 가는” 가려진 시야에 대한 간파,즉 가려진 것의 현전을 알아채는 주체의 탁월한 경험이 필요하다.

이현우는 일상 세계의 풍경에서 “가려진 시야”로 포착되는 장면들을 사진에 담았다가 그경험을 다시 회화로 전환시킨다. 이때, 몇 가지 중요한 회화적 사건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데, 그는 회화적 기법과 표현을 적절히 다루면서 재현과 추상 사이의 “닮음”과 본다는 행위의“불확실성”에 대한 미적 경험의 당위를 찾는다. 상대적으로 “큰 그림”에 해당하는 <벽과 벽사이>를 비롯해 또 다른 자리에 놓인 다섯 점의 회화를 보면 좀 더 명확하다.[*이번 전시에는<벽과 벽 사이>라는 제목으로 서로 다른 두 점의 그림이 있다.] 작은 그림들에서는 회화의 틀너머에 대한 지각이 크게 작용하여 어쩌면 보는 행위를 넘어서는 적극적인 공간 지각에 대한사유의 과정을 이끌었다면, 여기, 큰 그림들에서는 틀 내부의 회화 표면에 대한 추상적 경험을 보다 극대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물기 없이 쌓아올린 색채, 색면과 색면 사이의 경계에서감지되는 붓의 떨림, 화면을 가로지르는 여러 사선이 일으키는 평면성과 공간감의 혼재 등 화면 내부에 존재하는 형상들은 일제히 “어떻게 보이는가?”하는 지각 경험에 대해 환기시킨다.아니, “어떻게 보는가?”로 질문을 다시 바꿔보자. 이현우의 (큰) 그림들은 대상으로부터 어떤형상의 나타남과 주체의 바라봄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이 두 개의 나란한 신체적 현전이 열어주는 회화에 대한 현상학적 경험을 부추긴다. 그가 종종 자신의 그림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관람자와 그림이 서로를 마주 바라보는 느낌”이라는 게 회화로 전환된 일상 풍경이 어떤 주체에게 또 한 번 일으키는 회화적 전환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의“마주함”이라는 신체의 체험에 의해서 일어나는 사건이며, 그가 회화를 이해하는 방식인 것같다. 이현우는 보는 방법에 대한 의도를 굳이 내세우지 않고, 회화를 통해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경험하는 신체와 다른 신체, 이 둘 사이의 우연한 “교차”와 필연적인 “공존”을 더욱강조한다. 그는 작업에서 이러한 지각 경험이 회화적 사건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사유하기를보여준다.

풍경에 남아 있는 것들

[이현우: 오후 서너 시, 벽과 벽 사이]  누크갤러리

정주영

(도판1) 벽과 벽사이, 194 x 130cm, oil on canvas, 2019

큰 벽이 있는 미색의 건물이 있다. 벽의 크기에 비해 비교적 작은 창이 두 개층에 각각 하나씩 나 있고, 건물은 적어도 3층 혹은 그 이상의 높이로 가늠된다. 건축 시기나 양식적 특질을 분간할 수 없지만, 벽의 재질과 마감으로 보아사무용 건물로 보인다. 벽에는 벽 본래의 미색을 거의 다 가릴 만한 커다란 살구색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옆 건물의 것으로 보이는데, 그림자의 형태로보면 두 건물 사이에 거리가 있거나 건축선 안쪽으로 꽤 들여 지은 건물일 수도 있겠다. 창문의 크기로 다시 가늠하건대 벽은 건물의 정면이 아닌 측면의벽으로, 벽의 앞 또는 두 건물 사이로 짙은 회색의 담이 보인다. 담은 1층 정도의 높이로 건물과 나란히 위치한다. 콘크리트 또는 시멘트 마감일 것이고,고르지 않은 마감의 흔적과 오래된 듯한 얼룩이 보인다. 담 너머로는 전선줄이정돈되지 않은 채 늘어져 있다. 그리고 창문과 담의 비스듬한 기울기를 따라맨 아래쪽으로 약간의 바닥이, 우측면에는 밝은 회색으로 된 수직의 띠가 일직선으로 보인다. 이 얇은 띠 모양의 회색 면이 이웃한 건물의 모서리라면, 보는이의 시점에서 장면 속 대상들을 정렬했을 때 시야에서 가장 가까운 부분이된다. 공간은 평면적으로 펼쳐져 있지만 의외로 상당한 심도를 갖고 있는 셈이다.

사진으로부터- 사진과 그림

<벽과 벽 사이>(도판1)는 이현우의 2019년 최근작으로 이 그림이 보여주는 장면을 묘사해 본 것은 그의 그림의 출발점을 더듬기 위한 일정한 관찰이 필요해서이기도 하다. 작가 이현우는 일상의 스냅사진으로부터 그림의 소재를 정하고, 사진을 컴퓨터상의 포토샵 프로그램을 사용, 보정하는 것으로 일종의 스케치를 대신한다. 이동전화의 앨범 속 장면들은 일견 평범해 보이는 주변과 일상의 순간들이다. 최근에는 건물의 외벽을 주로 선택하고, 넓은 면적의 텅 빈 벽을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창, 배관이나 조명 등 건축적 요소들과 자주 대비시킨다.

사진의 선택과 함께 보정은 그림의 시작 전 과정인 셈인데, 평범한 듯 단조로운 일상의 스냅사진에서 작가는 그렇다면 무엇을 탈락시키는가? 우선 사진 전체로부터 특정한 부분을 잘라낸다. 이 크롭(crop) 과정은 일차적으로 장면 속그려질 대상을 좌우하고 사진의 프레임과 그림의 화면을 일치시키는 결정이다.풍경은 잘리고 구획 지어져 사진 이미지에서 그림 안으로 들어온다.

1)  그 다음이 흥미로운 부분인데, 소실점의 위치나 그에 따른 선의 각도를 수직,수평 방향으로 약간씩 조정하는 것이다. 건물의 전면을 위주로 그렸던 이전 시기의 그림들이나 최근의 비스듬한 위치에서 본 외벽 그림들 모두에 공통된 이과정은 현실의 장면이 그림의 장면으로 전환되는 분기점에서 중요하다. 삼차원공간을 화면 위에 고정시키는 시점의 통일성은 움직임의 정지도 수반한다. 그러한 원근법적 재현의 진공상태 안에서 그는 대상과의 거리, 대상을 바라보는위치, 나아가 그 시간과 분위기를 조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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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과정은 사실상 촬영 단계에서 이미 유사하게 이루어지지만, 사진을 보정하는 과정에서는 회화의 물리적 조건들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화면이라는 평면 위에서의 공간의 분할과 구획, 즉 일정한 구성의 과정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시선의 문제- 가까이 또는 멀리

이번 전시에서 이현우는 큰 그림과 중간 크기의 작은 그림들을 두 개의 전시 공간에 나누어 설치하고자 하였다.

2)  큰 그림과 작은 그림들의 두드러진 차이는 큰 그림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본 장면들이라면 작은 그림들은 보다가까이 공간/대상에 다가선다. 단순한 클로즈업으로 보이지만 큰 그림 속 대상들을 반복해서 작은 그림으로 옮길 때, 이미 그려졌던 장면들의 세부인 창이나 문, 조명 등은 작은 그림들에서 훨씬 전면적이며 구체성을 띤 채 다뤄진다.카메라의 줌 인(zoom in) 효과의 움직임처럼 시선은 대상 가까이 미끄러져 들어가고, 대상들은 풍경에서 정물로 자리바꿈하듯 일순간 사물처럼 보여 진다.대상을 가까이, 또는 멀리 바라보는 작가의 교차적 시선은 건물의 실내공간이나 외벽을 두 개의 그림으로 연속해서, 또는 나누어 그릴 때 조금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 바 있다. 이전에도 같은 장면을 약간의 시차를 둔 듯 두 프레임으로 그렸던 적이 있고(도판2), 붉은 벽돌과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교회 외벽을 그린그림(도판3)도 두 개의 그림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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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 의도에 대해서 작가는 화면 즉 캔버스의 크기를 결정하는 문제와 연관 지어 생각했다고 인터뷰에서 말한바 있다. 이동전화의 액정이나 디지털 기기들의 스크린에 익숙한 세대가캔버스를 대하는 방식과 화면의 크기를 정하는 기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으며, 전시장이 둘로 나뉘어 있는 특성을 고려하여 큰 그림을 작은 공간에서, 작은 그림을 큰 공간에서보여주는 등 설치방식에 의해 그림 속 공간이 전시공간과 어떻게 공명하는지 전시의 연출을 통해서 질문하고자 했다고 한다.

(도판2) 노랑 문 ,90.9x72.7cm, oil on canvas, 2018(좌)       노랑 문 2, 90.9x72.7cm, oil on canvas, 2018(우)

작가는 그 그림들을 때로 좌우,또는 상하로 전시하는데, 이 때 두 개의 장면들을 번갈아 바라보면 이상한 이질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특히 <도판3>의 경우 하나의 장면을 둘로 나누어그린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소실점이 다른 선(두 그림의 벽돌과 줄눈의 사선들을 보라)과 두 그림을 이어 붙여서 보여주지 않고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두고설치하는 등 두 장면은 처음부터 연속성이나 동일성보다는 차이를 드러내고자했던 접근으로 보인다.

(도판3) 교회 2층, 130 x 162cm, oil on canvas, 2018

교회 1층, 130 x 162cm, oil on canvas, 2018

이는 <도판2>에서처럼 두 그림을 좌우로 설치했던 경우도 비슷한데, 다른 점이 있다면 좌우로 나열한 그림들이 같은 프레임을 반복함으로써 시차와 같은 시간성을, 상하로 된 그림들은 시선의 이동에 따른 프레임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즉 <도판2> 그림들의 경우 장면은 흐르되 시선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고, <도판3>의 그림들은 대상이 고정된 채 시선이 움직이는 것으로 결국 시선의 위치와 능동성에서 각기 다른 시선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기의 문제- 풍경의 가능성

이현우의 풍경은 사진으로부터 파생되어 회화를 거쳐 또 다른 현실의 풍경으로 우리의 눈앞에 불려온다. 현수막이나 가림막, 셔터 등을 주된 소재로 그렸던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정면성이 부각된 파사드를 보여주었지만, 최근의 작업들에서는 보는 위치를 사선으로 비껴 공간의 깊이를 드러내고 벽과 측면 공간을 강조한다. 이 과정에서 큰 벽과 크고 작은 건축적 요소들은 대비되고, 그대비의 강도는 그림자의(더 정확히는 그림자의 각도) 존재를 통해 부각될 뿐만아니라 시간에 대한 단서 또한 제공한다. 색조나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한 붓질의 흔적도 그러한 시공간의 분위기를 공조하고 증폭해낸다.

원본 사진의 이미지를 자르고 보정한 결과물로서의 풍경은 그렇게 회화로 옮겨지면서 다시 그 곳, 그 시간의 체취를 복원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풍경과 처음 조우했던 순간의 멜랑콜리, 재현의 가능성을 회화에서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 영상의 스틸 컷처럼 정지된 시공간 속으로 감상자를 데려간다. 보나르(Pierre Bonnard)의 표현대로 미술이 정지된 시간이라고 하더라도 이현우의 풍경은 이 세계와, 적어도 그가 순간정지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름의 느슨한관계를 맺고 있다.3) 이현우가 사진으로, 다시 회화로 정제한 풍경들은 동결된이미지에 온도와 질감을 부여함으로써 동시대 많은 시각 이미지나 무빙 이미지들의 속도와 연속성으로부터 비켜서서 세계의 한 단면을 조용히 추출해낸다.오후 서너 시, 벽에 걸린 비스듬한 그림자처럼.

Solo Exhibition _ Nook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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