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lways wish you good luck》은 아트플러그 연수 의 첫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함께한 ‘김민, 김민석, 윤미류, 이정은, 이현우, 전장연, 정기훈, 랜-딩 페이지’ 8팀의 APY레지던시 보고전이다. 2021년 10월에 아트플러그 연수에 입주한 8팀의 작가는 지난 5개월간 인천 연수의 풍경을 대면한 경험을 자신들의 작업 한 켠에 새겼다. 이번 보고전은 연수에서의 시간이 이들의 작업 과정에 어떻게 참조되고 어떠한 관계맺음으로 표출되는지 그리고 작가의 행보에 어떠한 이음새로 나타나는지 그 단서를 주목하고자 한다.
이현우 – 침묵, 빛 속에 잠긴 오후의
이현우가 우리 앞에 던져 놓는 세계는, 거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같이, 말없이 조용한 세계, 때로는 물, 때로는 바닥, 때로는 창문, 때로는 벽면이 보이는 세계, 그러나 늘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이현우의 작업은 실상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리려는 시도이다. 이 그림들이 그려내려는 것은 우리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세계, 곧 심미적인 아름다움의 세계인 동시에 종교적인 ‘말할 수 없는’ 세계, 너무나도 일상적인 세계이자, 실은 누구나가 – 일상에서 또는 일생에서 때로 한번은 느끼는 세계, 침묵과 빛이 어우러진 세계, 더 정확히는 이러한 것들이 빚어내는 세계의 어떤 ‘분위기’(Stimmung, atmosphere)의 세계이다. 이현우의 그림 앞에 선 이는 실로 바라봄이 체험임을 알게 된다. 일본어 체험(體驗)의 원어 ‘experience’는 라틴어로 ‘지금으로부터 빠져나간다(ex+peritus)’와 ‘이제까지와 달라진다’라는 의미이다. 곧, 체험은 실험(實驗)이자, 말하자면, 탈-험(脫驗)이다. 내가 그것을 바라볼 때, 나와 그것이 모두 바뀐다. 이현우의 그림은, 안쪽의 내가 바깥의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보는 나와 보이는 그것 사이에서 생겨나는 어떤 체험, 가히 ‘현상학적 체험’이라고 말해도 좋을, 체험을 체험하게 만든다. 나는 이현우가 바라본 풍경을 그린 그림을 바라보며 체험한다. 거의 신비적인 그러나 결코 신비주의적이지 않은, 그런 체험을.
얼굴들
쓰다 지우다를 반복한다. 종이에 연필로 하면 흔적이라도 남을 텐데, 모니터는 언제 뭘 쓰기는 했냐고 냉정하게 차가운 하얀 화면으로 돌려버린다. 그 흔적이 또 그림처럼 남아 도와주지도 않겠지만 괜히 아쉽다.
요즘은 갯벌을 그리고 있다. 물 수면을 그리고 싶었는데 본의 아니게 발견한 장면이다. 축축이 젖은 땅 위로 그림자가 물길을 그리고 새들이 앉았다 가거나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담긴다.
주차장 바닥을 그린 적이 있다. 재개발 지역이었는데 새로 칠한 다가구 주택 녹색 철문과 비교되는, 오래된 벽지처럼 긴 시간동안 다져진 그런 땅이었다. 그걸 캔버스에 담아내려고 붓질을 칠하고 덮고를 반복했다. 깊은 표면을 다지고 싶었다.
작업으로서 발표했던 첫 그림은 도로 위 현수막을 그린 것이다. 당시 풍경에서는 새빨간 글자로 ‘빨래’라고 쓰여 있었다. 아마 연락처도 적혀 있었겠지 싶지만 기억에는 강렬한 그 두 글자만이 남아 있다. 디지털 시대에, 그리고 빠르게 지나가는 도로 위 저런 현수막이 얼마나 제 기능을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충분한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뒤 풍경을 가리는 막일 뿐인데, 이런 생각으로 저 장면을 그리면 풍경을 그리면서 지워낸다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현수막 뒤로 보이는 자전거 타는 형체가 이런 생각을 더해줬다.
그 후로 여러 막을 그렸다. 공사용 부직포나 행사장 천막, 내려간 셔터와 호텔 입구 가림막 등 일상에서 마주하는 면들을 그렸다. 특정 소재를 반복적으로 그릴 때는 자연스레 비슷한 성격의 다른 소재들이 발견되곤 했다. 언제는 공사장 철문을 그린 그림을 보고서 친구가 관음증이 있냐고 물었다. 면을 그린다고 그린 그림들은 가만 보면 어딘가 열려 있었다. 작은 틈이 있는가 하면 천막 사이 사람의 실루엣이 그곳을 들어가는 것인지, 나오는 것인지 모를 어정쩡한 태도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노란 문을 두 점 그린 그림은 복도 너머로 사람의 머리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돌이켜보면 항상 화면의 저 너머를 신경쓴 듯하다. 표면들은 공간을 납작하게 만들지만 재현을 좇는 그림은 계속해서 그 깊이를 고민하게 만든다.
공간이 평면적으로 느껴지고, 길 위에 오브제를 그린 그림이 풍경화인 동시에 정물화로 보이는 경험은 일상이 그림이 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상을 피부로 느끼고 싶다는 생각은 면을 채우는 붓질을 수북하게 더하고 대상과의 거리를 가깝게 만들었다. 과감히 면들을 화면에 담고자 여러 장면들을 찾았다. 벽면 위로 그려지는 그림자, 바닥 위 보도블록이 만들어내는 패턴 등은 캔버스 위에서 드로잉이 되고 리듬과 추상성을 더해준다.
갯벌을 그리며 땅을 다진다. 단단하지 않은 젖은 땅을 그리기 위해 그리고 덮어내기를 반복한다. 그리다보면 대상을 잊는다. 잊히진 않지만 멀어지려 한다. 물 수면을 그리고 싶었던 마음이 다리 그림자를 물길로 읽는다. 그 시커먼 푸른 면이 틈이 된다. 땅을 다지다 보면 갯벌이 바다가 되고 사막이 된다. 주차장 바닥처럼 쌓이다 보면 더러운 벽지가 된다. 도시에서 발견하던 면들과 달리 자연물이 만드는 신비감을 핑계 삼아 자유롭게 물감을 얹는다. 마침표가 언제 찍힐지 모른 채로 붓질을 쌓는다. 그렸다 지운다. 지우는 행위 역시 물감을 얹고 색이 올라가는 덕에 글을 쓸 때처럼 되돌리고 다시 실행 할 수가 없다. 뭐라도 캔버스에 남겠지, 그림이 되겠지 위안을 삼는다.